미,일의 잠수함 건조 - 제2차 세계대전 미.일 태평양잠수함전(2)


<미국의 잠수함 건조>

미국은 1914년 이래 꾸준히 잠수함을 건조하여 1920년 800톤 크기의 S급 표준형 잠수함을 건조합니다.
그러나 S급 잠수함을 건조하는 동안 수상함들이 너무 빠르게 발전해 버려서 S급 잠수함은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시대에 뒤떨어진 잠수함이 되어버렸습니다. '-';;

그래서 미국은 새로운 함대형 잠수함 건조에 착수하게 되고 독일 잠수함을 모방하여 2000톤급 V-1급 잠수함을 건조합니다.
그러나 이 V-1급도 운용시험에서 많은 문제점을 도출하게 되고 다시 개선작업에 착수합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난뒤 돌핀이라고 명명된 1500톤급의 V-7형 시험잠수함을 탄생시켰고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잠수함들은 이 돌핀을 기본 모델로 제작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다음과 같은 함대형 잠수함들을 붕어빵 찍듯 찍어내게 되는거죠.

Tambor class

1939년 미국은 표준형 함대형잠수함 설계를 끝내고 탬버(Tambor)급으로 명명된 잠수함을 양산합니다.

탬버급 잠수함의 기본적인 스펙은 다음과 같습니다.

- 톤수 : 1475톤
- 길이 : 93.6M
- 엔진 : 디젤엔진 4기
- 추진용 전기모터 : 4기
- 속도 : 수상 20노트(10노트로 11000마일 항해)
- 어뢰 발사관 : 함수 6문, 함미 4문
- 무장 : 어뢰24발, 3인치포등

특히 탬버급 잠수함은 승조원 환경분야에서 과거 잠수함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조리장비가 충분한 조리실, 화장실내의 샤워시설, 침실과 구분된 식당,  그리고 에어컨등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어컨은 열대지방에서 작전 시 실내온도가 섭씨37도까지 오르고 습도가 100%에 육박하여 고통받는 승조원과 응결수로 생기는 전기/전자장비의 고장을 간신히 해결 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잠수함 설계안을 놓고 해군의 Thomas Hart 제독은
"이러한 컨셉(특히 에어컨 같은...)은 사치야. 연안방어용의 스마트한 잠수함을 만들어~ "
라며 극구 반대 하여 Charles Lockwood 제독을 필두로한 설계팀과 마찰을 빚었지만 어쨋든 얼렁뚱땅 설계팀 뜻대로 잠수함을 제작하게 됩니다.


Gato Class
가토클래스는 1940년에 건조가 시작된 함대형잠수함으로 이 급은 2차 세계대전에 제작된 모든 미국 잠수함의 설계표본이 되었습니다. 총 77척이 건조되었으며 170만톤의 일본선박 격침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태평양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카리브해와 대서양에도 투입되었으며 1942년 횃불작전(Operation Torch)에도 투입됩니다.
2차대전 미국잠수함 격침순위 3위내 랭킹을 모두 가토클래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잠수함의 유일한 흠이 있다면 장착된 마크14 어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놈의 어뢰는 심도도 불량.. 충격신관도 불량.. 자기감응장치도 불량.. 암튼 미국잠수함이 전쟁 초기 뻘짓을 하게끔 만든 어뢰입니다.
몇몇의 가토 클래스는 심해자기 온도계, 표면탐색레이더, 전기동력어뢰등 신장비를 장착 하기도 했습니다.

가토클래스 제원

- 톤수 : 1525톤
- 길이 : 95M
- 엔진 : 디젤엔진 4기
- 추진용 전기모터 : 4기
- 속도 : 수상 21노트(10노트로 11000마일 항해)
- 어뢰 발사관 : 함수 6문, 함미 4문
- 무장 : 어뢰24발, 3인치포등


Balao Class
버러우(표기가 맞나 모르겠지만..)급은 전쟁 중 가토클래스를 개량한 잠수함입니다.
특징은 고압축강을 사용하여 잠수심도를 개선한 점과 갑판에 설치한 포가 5인치로 변경되었다는 점입니다.

버러우급 제원

- 톤수 : 1526톤
- 길이 : 95M
- 엔진 : 디젤엔진 4기
- 추진용 전기모터 : 4기
- 속도 : 수상 21노트(10노트로 11000마일 항해)
- 어뢰 발사관 : 함수 6문, 함미 4문
- 무장 : 어뢰24발, 5인치포등


미국잠수함이 타국 잠수함에 비해 우수했던 부분은 TDC(Torpedo Data Computer:어뢰사격계산기)를 탑재하여 사격문제를 보다 쉽게 해결 할 수 있었고  선저에 음탐센서를 탑재하여 착저시엔 선체 내부로 집어넣을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점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잠수함에 비해 전기장치와 통신장비 및 사통장치는 우수했으나 독일잠수함에 비해 잠망경, 함교 야간관측장비, 디젤엔진, 잠항심도등 몇가지는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뢰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 발발 후 치명적인 어뢰결함으로 2년 가까이 시달리게 됩니다.


<일본의 잠수함 건조>
일본 잠수함의 특징은 철저한 임무지향적으로 설계되었다는것입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RO급 연안/항만 방어용 잠수함을 제외하고 모든 잠수함은 미국의 대형전투함을 공격할 목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일본은 전략목적에 따라 3종류의 대형 잠수함을 건조 하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전방감시형 잠수함 : 정찰 범위를 최대로 확보하기 위해 갑판격납고에 정찰용 수상기를 탑재
- 지휘 잠수함 : 정찰용 수상기 탑재는 기본이고 지휘부의 거주시설과 통시시설 구비
- 공격형 잠수함 : 함수에 8문 어뢰발사기를 설치하고 2인승 A형 잠수정(어뢰 2발이 부착된 잠수정) 1척 탑재

이 3종의 잠수함은 미국의 함대형 잠수함보다 규모가 훨씬 컸으며 속도또한 빨랐습니다.
그리고 1936년 시행된 3차 군사력 개선계획에 의해 위의 3종류 외에 다목적용 I급 잡수함과 위의 3종 잠수함보다 규모가 훨씬 큰 잠수함건조에 착수했습니다.
일본의 대형잠수함 건조계획은 사실상 1940년에 완료되었으나 잠수함 개발을 계속하여 1941년에 2000톤급 잠수함을 건조했습니다.
이 잠수함은 갑판 좌우현에 항공기 격납고를 하나씩 달고 한쪽엔 비행기 동체 한쪽엔 날개를 넣고 다니는 형태가 있었고 격납고 없이 전/후 갑판에 5.5인치 함포를 설치하고 다니는 형태도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일본이 건조한 잠수함중 수상항공기 3대를 탑재한 400피트 길이의 5200톤급의 항모 잠수함도 있었습니다.

B1(I-15급) Type 
B1급은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이 가장 많이 생산한 타입의 잠수함입니다.(20척건조)
함수에 격납고를 설치하여 수상정찰기(수상정찰용 제로센) 1기를 탑재하고 다녔습니다.
B1급중 I-26은 미 항모 Saratoga에 손상을 입혔고 I-19는 미 항모 Wasp을 격침 시킨 기록이 있습니다.

- 톤수 : 2584톤
- 길이 : 108.7M
- 엔진 : 디젤엔진 2기
- 추진용 전기모터
- 속도 : 수상 23.5노트(16노트로 14000마일 항해)
- 어뢰 발사관 : 함수 6문
- 무장 : 어뢰17발, 140mm포등
- 수상정찰기 1기 탑재


B3 Type

이 급의 I-56은 미 잠수함 USS Snook을 격침시킨것으로 판단 되고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I-58은 미 중순양함 Indianapolis를 격침 시켰습니다.

AM Type

이 급은 A타입 개량형으로 2기의 수상기를 탑재한 대형 잠수함입니다. 이 타입은 수상항해시 그 항해거리가 획기적으로 길었지만 수중항해시 성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여 손쉬운 먹이감이 되어버렸습니다.

- 톤수 : 3603톤
- 길이 : 113.6M
- 엔진 : 디젤엔진 2기
- 추진용 전기모터
- 속도 : 수상 16.75노트(16노트로 21000마일 항해)
- 어뢰 발사관 : 함수 6문
- 무장 : 어뢰12발, 25mm포등
- 수상기 2기 탑재


C3 Type 

이 잠수함은 일본이 20척 건조를 계획하였으나 전쟁중 3척만 건조된 수송 목적 잠수함입니다. 이 급중 하나인 I-52는 야나기미션 일환으로 독일에 고무, 금, 엔지니어들을 수송하다가 아조레스 남서쪽 800마일 해역에서 미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습니다.

- 톤수 : 2564톤
- 길이 : 108.6M
- 엔진 : 디젤엔진 2기
- 추진용 전기모터
- 속도 : 수상 17.75노트(16노트로 21000마일 항해)
- 어뢰 발사관 : 함수 6문
- 무장 : 어뢰19발, 140mm포등


Sentoku Type (I-400Class)

전쟁 말기 파나마 운하를 파괴할 목적으로 제작된.. 당시로서는 무지막지하게 큰 Sentoku 급은 1960대 핵추진잠수함이 나오기 전까지는 최대덩치의 잠수함입니다.

- 톤수 : 5223톤
- 길이 : 122M
- 엔진 : 디젤엔진 4기
- 추진용 전기모터
- 속도 : 수상 18.75노트(14노트로 37500마일 항해)
- 어뢰 발사관 : 함수 8문
- 무장 : 어뢰, 140mm포등

일본잠수함은 속도나 항해거리, 특히 어뢰에 있어서는 미국 잠수함보다 우수했으나 작전의 효율성이 떨어졌고 비효율적인 항공기 탑재..(항공기를 조립해서 띄우고 다시 분해해서 넣고 하는... 이 작업동안은 해면에 그대로 노출..) 그리고 특히 전자장비의 낙후성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지만 일본해군은 오로지.. 함대결전!!을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 안습입니다..

아무튼 이번 편에선 읽은 책의 내용과 이것저것 자료를 짬뽕하여 태평양에서 숨어다니던 미.일 잠수함에 대해서 소개해봤습니다.
다음편엔 본격적인 전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by 무는개 | 2008/03/24 15:35 |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0)

1차대전과 잠수함 - 제2차 세계대전 미.일 태평양잠수함전(1)

이 글은 얼마전 읽었던 제2차 세계대전 미.일 태평양 잠수함전의 후기 입니다.
이 책은 원작자는 영국 전사 연구가 Peter Padfield 교수이며 원제는 'War Beneath the Bea(부제 : Submarine Conflict during World War 2)' 입니다.
원서는 태평양뿐 아니라 대서양과 지중해 잠수함전을 포함하고 있지만 독일이 주도했던 잠수함전에 대한 것은 '10년 20일'(안병구 대령 번역, 1995년 삼신각 발행)에 상세하게 나왔기 때문에 본 번역서는 태평양 잠수함전만 다뤘다고 합니다.

1. 1차 세계대전과 잠수함

1차대전의 독일 잠수함의 통상파괴전에 대한 영국의 전술

미국의 해양전략가 Alfred Thayer Mahan은 1890년 부터 영국해군력 운용에 기반을 둔 이론서들을 저술하였습니다.
Alfred Thayer Mahan(고집쟁이 할아버지처럼 생겼네요)

마한이 주장한 해군전략의 핵심은 강한 해군력을 가진 국가와 약한 해군력을 가진 국가로 나누어 서술되었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강한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기동전투함대를 이용하여 적국을 해전을 통해 격멸하거나 항구로부터 출항을 봉쇄하여 재해권을 장악하고 적국의 해안선에 차단선을 형성 궁핍에 빠뜨려 전쟁에 승리한다.

약한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
소규모 기습전력을 사용하여 통상파괴전을 수행한다.

결론 : 소규모 기습전력의 통상파괴전으로는 기동전투함대의 해양통제를 능가 할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은 결과적으로 마한의 이론을 입증해준 전쟁이었지만 그 과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영국은 쥬틀랜드에서 독일과 해전을 벌여 독일 해군을 격파했고 재해권을 장악하여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지만
영국의 손실도 매우심각한 수준까지 몰리기도 했습니다.
1917년 독일 잠수함의 통상파괴전에 의한 영국은 선박손실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해 4월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선언하고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미국은 William Sims제독을 런던에 파견 하였고 영국해군 참모총장 John Jellicoe은 심스제독과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현재 추세가 계속된다면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 당시 독일에 의한 영국선박 격침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1917년 2월 : 536,000톤
1917년 3월 : 603,000톤
1917년 4월 : 900,000톤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한 이유는 영국이 해군운용전술에 기인하였습니다.
영국은 대잠세력을 독일 잠수함 소탕작전에 투입하고 있었고 결국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선단은 호위없이 단독으로 항해하는 현상이 벌어져서 독일 잠수함들은 손쉽게 수송선단을 공격 할 수 있던것입니다.
결국 참모진에 현명한 판단과 지속적인 건의로 영국전쟁 지휘부는 대잠작전의 형태를 "소탕"에서 "호송"으로 전환합니다.
이러한 작전변경 후 미국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영국에 공급되는 선박척수가 독일에게 격침당하는 수송선박보다 많아지게 되었으며 결국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1차 대전 후 되니츠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1차대전이 끝나고 전쟁중 포로로 잡혔던 Karl Dönitz는 석방되어 영국순양함을 타고 독일로 돌아오는길에 지브롤터에 기항했습니다.
항구에서는 연합국의 승전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되니츠는 이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영국함장을 만나게 됩니다.
되니츠는 순양함 마스트에 펄럭이는 연합국 국기를 가리키며
"독일 한나라에 전 세계국가들이 연합하여 승리를 얻은 느낌이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함장은 머뭇거리다가
"그렇군.. 아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잠수함을 불법무기로~
기본적으로 1차 대전이 끝난 후 각국은 잠수함 세력의 발전에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경험을 바탕으로 분야별 장비 성능을 개선시키는 정도였으며 이에 비해 수상함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중 잠수함 발전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사례 하나는 영국이 잠수함을 불법무기로 규제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1차 대전에서 독일 잠수함에게 항복직전까지 몰렸던 경험을 가진 영국으로서는 그럴만도 했겠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뒷구멍에서 잠수함개발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각국이 해군력 증강에 매달리자 1922년 워싱턴에서 경쟁완화에 대한 회의가 개최됩니다.
영국은 이 회의에서 잠수함 보유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의제를 상정했으나 다른나라의 반대로 실패합니다.
그러자 잠수함의 공격범위를 군함으로 제한하자는 의견을 다시 제시 했지만 이것도 프랑스이 반대로 무산됩니다.
단지 영국이 더이상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는 점만 확인 시켜준 채 회의는 끝나고 만 것이죠.

왜냐하면 미국, 일본 같은 신흥공업국가들이 영국해군에 대항 할 수 있는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 책에 1차대전에 대한 이야기는 그닥 많지 않아서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다음 2편에선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 2편에 계속~

by 무는개 | 2008/03/21 11:24 |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0)

전함 야마토의 식사는 어땠을까...

1945년 4월 7일, 오후 2시 23분, 그토록 일본이 세계 최대 최강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야마토는 미군기의 파상 공격을 받아 함수와 함미의 포탑에서 유폭을 일으켜, 카고시마현 토쿠노시마바다에서 침몰 한다.
최대전함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허송세월을 보내던 야마토는 급기야 오키나와 해안에서 해안포대 역할을 해 싸운다는 키쿠스이 작전때문에 출항 했다.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트럭섬에서 할일없이 노는중..)




야마토의 식사는 일본 해군중에서도 가장 맛있었다고 야마토 승무원들은 전한다.
대본영 파견참모 쓰지 마사노부 중령은 1942년에 트럭섬에 정박중이던 야마토를 방문해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장관에 면회했다. 회견 후 야마모토 장관은 츠지 참모에게 식사를 내오도록 지시 했다.

식사의 메뉴는
「도미 소금구이, 도미의 생선회, 차가운 맥주」

마사노부 중령이 이 식사에 감격해서 야마토를 호텔이라고 불렀다. 이것에서 유래해 그 후 전함 야마토는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전함 무사시는 「체육 학교」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거기서 무신 축구를 찼나...)
이렇게 부르게 된 내면에는 트럭섬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야마토에 대한 타 함정 병사들의 야유섞인 목소리가 깔려있는 것이기도 했다 한다.

물자가 급속히 딸리기 시작한 1945년에도 「이렇게 좋은 것을 먹어도 되는 걸까..」라고 생각 하면서도 「매운 카레라이스와 바나나와 사과, 마카로니가 들어간 야채 사라다가 맛있었다고 회상하는 승무원도 있다.

야마토의 식사가 맛있었던 것은, 함장 전용취사), 준사관 이상 취사실에는 전기 냉장고가 있었고, 하사관과 병실을 위해서 식료품 보관용 대형 냉장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토의 식료품 냉장고의 동력은 8만 킬로 칼로리, 50 마력의 터보식 냉동기 4대의 일부였다.
식료용 냉장고의 터보식 냉동기는 히타치제였다고 말하는 증언도 있다.(히타치가 이때 냉장고를....)

군함에 냉동기가 필요한 것은, 탄약의 성능 유지와 유폭을 막기 위해서이다.
탄약의 성능은 섭씨 20도에서 가장 성능이 좋다고 한다. 탄약고는 보통 함정을 움직이는 기관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실내 온도가 수직상승하여 자연 유폭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냉동기는 준사관 이상의 거실의 냉방에도 이용되었다.

야마토는 당시의 최신예함으로, 주포인 18.1인치 3연장포는 최대 사정거리 41.5Km였다.
표적까지의 거리를 계측 하는 마이크로미터, 표적의 속력, 침로, 포가 가지는 고유의 탄도, 풍향, 풍속 등 여러가지 데이터를 계산하여 그 결과를 포측에 지시 하는 사격통제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었다.
지휘 장치는 광학적 계산기구를 이용했다. 광컴퓨터의 원조라고 말하기도 한다.(물론 일본넘들의 말이다...)
마이크로미터, 포격전 지휘 장치 모두 니콘 제였다고 한다.

야마토가 침몰 하던 날, 점심식사 전부터 전투 태세에 들어가는 바람에 전투배식인 2개의 주먹밥을 먹은 병사도 있었고 먹지 못했던 병사도 있었다고 한다. 죽는 마당에 배도 고프고...
저녁식사는 팥찰밥 통조림과 쇠고기 통조림, 야식은 단팥죽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먹고 죽었으면 때깔도 고왔을것을..............)

by 무는개 | 2008/03/19 11:51 |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0)

전함 무사시의 최후

※ 무사시란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의 전함의 이름이다. 야마토와 동급으로 건조당시 세계최대의 전함이었다. 이 전함은 이미 해상전투가 항모위주의 전술로 넘어가고 있을때 일본해군의 시대착오적인 거함거포 주의의 고집이 만들어낸 애물단지였다.  세계최대의 거함이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무사시와 야마토는 별 활약을 하지 못한채 바다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글은 그 당시 무사시에 승조했던 일본인 수병출신이 쓴 글이다.

 

마지막 출격에 참가한 한 수병이 본 침몰


 

시바타 쿠라치(柴田倉治)

 

 

생존자 430명


 전함 「무사시」가 필리핀의 시브얀해에서 침몰 한 후 오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언제 부터인가 거함 야마토나 무사시의 최후가 미화되어 신화처럼 후세에 전해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전쟁의 잔혹함을 숨기려 하고 있다.


아키타현의 타시로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우리 집은 선조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징병으로 인해 해군에 입대해 생활한 수년을 제외하더라도 벌써 60년 넘게 살아 왔지만 70세를 넘어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으면 않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함 무사시의 생존자로서 그 때의 일을 밝혀 두려는 생각을 한다.

브루나이에서 출항 했을 때 무사시의 승무원은 2399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생존자는 43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44년 10월 24일 레이테만에 돌입한 무사시는 만신창이가 된 끝에 침몰 하여 승무원은 바다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생존 표류자 1329명은 코레히드르섬에 상륙 하였고 그 중420명은 수송선을 타고 내지로 향했지만 어뢰에 맞아 침몰 하여 300명이 사망했다.
코레히드르에 남은 잔류조는 필리핀 각지의 전투에 투입되어 대부분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침몰 직전 「군도(軍刀) 지킬 수 있다」


무사시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마다 장교나 상급 하사관의 증언을 기초로 적은 것은 많지만 하급 병사의 증언이 적은 것에 나는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증언을 남기기 전에 죽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내지 귀환자는 장교 우선이었다. 나는 전원 잔류조에 해당되는 소화 18년 9월에 입대한 하급병사였지만 포술 학교를 나올 때 수석이었던것과 포술 장려상을 받았던 것이 고려되어 내지에 귀환했다. 그 수송선이 침몰하여 대만의 고웅(高雄)에 상륙 했을 때, 선임 하사관으로부터
「시바타, 너는 악운의 강한 녀석이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악운」이란 말을 들었을 때 심하게 쇼크를 받았다.
이런 적도 있었다. 함이 가라앉는 동안에 당시 열입곱살이었던 분대사종병(分隊士従兵)이 군도(軍刀) 2개를 가지고 있었다. 종병은 상관의 신변을 돌보는 직책이다. 가능한 한 몸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때에  군도를 끝까지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시시한 이유냐고 생각했지만 군인은 명령에 절대 복종을 해야 했다. 종병은 출세가 빠르기 때문에 하급 병사가 바라는 직책이었지만 징병으로 해군에 들어간 나는 종병으로서 상관의 기분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성적 우수자는 종병이 되기 쉬웠다. 성적이 좋았던 나는 종병이 될수 있는 케이스였지만 반장에게 신청하여 종병 지명을 면했다. 만약 종병을 하고 있었다면 사관의 희생물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살아 남았지만 고락을 함께 한 전우들은 함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 것을 언제나 무거운 짐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급 병사로서 눈으로 무사시의 최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으로 죽은 전우에 대해 변변치 않지만 명복을 빈다고 생각한다.


주포, 발포 충격으로 고장


「주포 바카야로!」
 오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3연장, 3포탑 총 9문의 주포는 일본해군의 상징이었고 주포요원은 신과 같은 존재였으므로 바카야로라는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10월 24일 오전 10시 30분경 내가 있던 후부측적소(後部測的所)는 긴장의 극한 상태였다. 수평선상에 적기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측적소는 적기와 자함의 측정거리를 방공 지휘소에 통신하는 것이 역할이었다.
함내에 명령이 떨어져 주포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훈련중에는 체험한 적이 없는 강한 충격을 전신에 받아 비틀거리면서 양쪽귀를 틀어 막았다.
얼마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측적 반장이 「왜 주포는 계속해 공격하지 않는가!」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때 나의 담당인 97식 고성 수화기의 표시등불이 격렬하게 점멸하며 버저가 울었다. 수화기를 들자 「방공 지휘소 명령! 후부측적소는 잠시측적치의 송신을 중지하라!」라고 했다. 무슨일인지 알지 못한 채 큰 소리로 복창했다. 바로 그때 수화기를 취한 반장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졌다. 발포의 충격으로 주포의 조준기가 고장났다고 하는 것이다. 거포 무사시는 스스로 자신을 사용하고 자신을 잃었던 것이다. 우측 측적수의 상등병조가 「금방 복구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반장은 「주포 바카야로!」라고 외치면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조준기는 적의 뇌격으로 고장났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국 실전에서는 주포가 아닌 기관총원이 활약했다.
그 날이 저물려고 할 때 후 갑판에 총원이 집합했다. 전기 계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력 조타를 시도한다고 하였고 부조타실에 들어가야 하는 오십인의 결사대가 모집됐다.
결사대는 즉시 편성되었다. 나도 그 일원에 참가했다. 모자에 선이 들어간 하사관은 눈에 띄지 않았고 최하급 병사의 식탁에서 낯익던 사람이 많았다. 함은 침수하면서 경사가 점점 기울어진다. 지금 함저의 부조타실에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일은 명백했다. 오십인은 한사람 한사람 양쪽 어깨를 얻어 맞으면서 인원수를 셀 수 있었다. 나는 두 번째인가 세번째였다. 얻어맞았을 때 죽음의 공포로 머리카락이 곤두 섰다. 군화를 신은채로는 갑판을 흐르는 피때문에 미끄러져 서 있을 수 없어서 맨발로 서 있었다.
행동 개시의 명령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함미의 흰 항적이 사라지고 무사시는 정지했다. 함 바닥에 들어가지 않고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의 운명도 다했다고 생각하는 기분, 두꺼비 자갈 맞은 복잡한 감정이었다. 이 결사대의 일도 세상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통나무에서 차례차례 낙오하던 사람들


함은 좌현으로 크게 기울어져 전원이 눈사태처럼 갑판으로부터 미끄러져 떨어졌다. 승무원은 통나무나 각재를 잡고 밤의 바다에 떠 있었다. 표류자 사이에 「키미가요(일본국가)」가 합창 되었고 이윽고 「 海行かば」라는 노래로 바뀌었고 다음은 군가가 밤하늘 아래를 울려퍼졌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호저의 고향」이라고 하는 가요곡이 흐른 것이었다. 이 곡은 함이 아직 싱가폴에 정박하고 있던 추석 밝은 달이 떴던 밤, 달구경 연회가 함상에서 개최되어 그 때의 노래 자랑에서 승무원이 노래했던 1위로 뽑힌 망향의 노래였다
「석양은 빨갛고 몸은 슬퍼… 」로 시작되는 슬픔이 가득 찬 멜로디는 내일을 암시하는 소리로 들렸다.
나는 들보로 내 몸을 통나무에 붙여 조금이라도 오래 살려고 했다. 자신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한 자루의 통나무에 30명이나 매달려 있으면 바다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로 열심히 헤엄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유가 퍼진 바다는 기름이 기화하여 졸음을 유발시킨다. 한사람, 두 사람… 전우가 가라앉아 갔다. 처음에는 서로 격려하고 힘내라고 말해도 낙오자가 늘어날수록 통나무는 부력이 늘어갔다. 가라앉는 사람이 나온다고 안심하는 내 마음의 추악함이 지금도 마음의 상처가 되어 남아 있다. 전쟁은 역시 전쟁밖에 없다. 그 밤의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면서 그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한다. 

 

by 무는개 | 2008/03/19 11:46 |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0)

그들이 머무른 자리는 남지나해이다. -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후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선포하였고 싱가폴에 머무르던 영국의 Z기동함대는 일본함대 수색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일본 함대를 가볍게 여기던 영국은 항공기의 지원없이 함대만으로 수색작전에 돌입하는 무모한 행동을 저지르고... 역으로 영국함대를 수색하던 일본해군 항공대에 발각되어 그 당시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고 만다.
 
이 글은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몇년간 자료를 모아 취재한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스의 최후에 대한 글중 일부이다.


1941년 12월 8일 17시 35분, Z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영국해군 기동부대는 일본 해군 함대를 수색하기 위해 싱가폴을 출항했다.
함대는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스, 구축함 테니도스, 일렉트라, 익스프레스와 호주해군의 뱀파이어로 구성되었다.
이틀 후 콴탄 근처의 말레이시아 동부해안에 도착했을 때 대공경보가 울렸다.
그것은 잊지못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

갑자기 일본 폭격기가 상공에 출현했다. 순양함 리펄스의 기록에는 하사관 한명이 대공견시병으로부터
"적 폭격기 21000피트에 출현" 이라는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함의 양현에 있던 기관포들이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지만 명중 시킬 수 없는 높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폭격기들이 강하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첫번째 타격 목표는 순양함 리펄스의 취약한 장갑 부분에 초점이 맞춰졌다. 적극적인 회피기동에도 불구하고 리펄스는 폭탄의 파편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250 Kg의 폭탄이 갑판위에 명중되었고 곧 공조실의 폭발로 이어졌다.

기관실의 기관병이었던 존 다이크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것은 공포의 순간이었다며 회상한다.

“바로 그 다음 경보음이 울렸어요. 나는 함상기의 연료공급을 지원 할때까지 불길속에 있었죠. 폭탄은 떨어지고… 내가 그곳을 떠나자 마자 폭탄이 폭발했어요.”

첫번째 공격으로 리펄스가 손상을 입었지만 곧 기능을 회복했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기분나쁜 정적은 곧 깨지고 말았다. 더 많은 비행기가 나타난것이다. 이번은 고공 폭격기 같은 먼거리에서의 공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낮게 다가왔고 어뢰를 바다위에 떨궜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속도를 25노트로 증가시켰지만 뇌격기들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5.25인치 보조함포는 연속사격의 모드로 세팅되어 뇌격기들을 요격했지만 애석하게도 소용이 없었다. 상갑판의 병사들은 공포속에서 마지막을 선사해줄 어뢰의 항적을 보고있었다. 탈출 할 수 도 없었다. 35000톤의 거대한 전함은 폭격기들속에 내동댕이 쳐지고 말았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11도로 기울어져 속도는 15노트로 떨어졌고 양쪽의 조타기어와 주 전기장치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이것은 더 이상 항해 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더 심상치 않은일은 5.25인치 포의 전원공급기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것이었다.

일본군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더 이상 싸울수 없다는 것을 빠르게 판단하고 건조된지 25년된 리펄스에 공격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폭격기들의 속도와 민첩함은 대공포인 REG-Woods로 소용이 없었다.

”나는 우리 배를 향해 저고도로 날아오는 비행기를 봤죠. 그것들은 마치 스핏파이어(영국의 전투기) 같아보였습니다."

함장 터넌트는 셀수없는 어뢰공격에서 회피 할 수 있는 우수한 항해술 가지고 있었다.
그의 대단한 기술은 수병이었던 테드 메트류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우리 함장은 우리가 어디서나 어뢰를 수색하는데 만전을 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32000톤의 전투함을 순양함 보다는 구축함에 가깝게 훈련시켰죠. 우리의 위상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겠죠."

일본군의 집요함은 리펄스의 좌현과 중앙에서 굉장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응징당했다. 이 공격을 마치 무시하는듯이 리펄스의 대공포병들은 두대의 적기를 떨어뜨렸으며 이내 더욱 더 많은 적기의 명중을 성공하였다. 이때 우현에서는 구명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리펄스는 여전히 원할한 운용을하며 공격받은 프린스 오프 웨일즈를 향해 움직여 지원하기 시작했다.

테넌트 함장은 적 공격이 있을때 이미 19개의 어뢰를 탐색해 냈다. 프린스오브 웨일즈에 근접하는 3대의 뇌격기가 대공조준기에 들어왔고 아주 가까워질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뢰 탄두를 조준하여 격추시켰다.

리펄스는 이 3중의 공격을 막아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세발의 어뢰가 배밑으로 사라졌고 갑자기 거대한 물기둥이 좌현에서 솟아올랐다. 갑작스럽게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전투는 끝났다. 리벌스는 패배한 것이다. 3분만에 513명의 승무원과 함께 리펄스는 침몰하고 말았다.

프린스오브 웨일즈는 ”최후의 일격”으로 전복되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함선의 상태는 절망적이 되었다. 최초의 어뢰가 명중한 이후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다른 공격에 계속 손상을 입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는 기울어져 갔고 생존할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당시 18세의 승무원이었던 통신병 빌존스는 많은 승무원과 마찬가지로 그보다 먼저 있었던 1941년 5월의 전투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새로 취역한 전함 후드가 불행하게 침몰된 일에 대한 기억이었다.(후드는 독일전함 비스마르크의 함포에 침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물이 배의 깊숙히 있는 통신실에 들어오기 시작할때까지 이게 무슨일인지 몰랐습니다. 즉시 우린 통신실을 비울것과 갑판으로 철수를 명령받았습니다. 오랫동안 기어오른 끝에 우린 갑판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황폐한 모습이었죠. 우리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의무실로 옮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췌한 모습으로 배위에 눕혀졌고 그들의 상처는 너무 심해서 생명을 유지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습니다.…”

셀수 없는 어뢰가 명중된 후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비참상 상태가 되었다. 아마도 18000톤 가량의 물이 선체에 스며 들어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금있으면 침몰할것이 확실했다. 고공 폭격기로부터 마지막의 한방이 날아왔다.
5.15인치 포의 견시병이었던 앨런 맥키버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대공포의 열려있던 문앞에 서 있었어요. 갑자기 세번의 굉장한 폭발이 우리 환풍구 사이에서 일어났고 나는 환풍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것을 곧 깨닳았죠. 그 폭발의 위력은 포탑을 포이(砲耳:포신을 포가에 받쳐놓는 원통형 돌출부)에서 날려버렸죠. 만일 내가 주 환풍구에 보호를 받지 못했다면 오늘 이자리에 있지 못했을겁니다."

맥키버의 머리는 많이 찢어졌고 피를 많이 흘렸다. 하사관 크라우더는 트랩을 통해 그를 HMS 익스프레스로 옮겨서 안전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그를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난 그가 침몰전에 구조 됐는지 알지 못합니다."

13시 20분 프린스오브웨일즈는 급속하게 기울어져 전복된 후 327명의 승무원과 함께 침몰되었다. 필사적인 구조가 진행되었다. 호위 구축함들은 눈물어린 파멸의 현장에서 수백명을 구조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단 두시간동안의 비통한 전투에서 영국해군의 자존심은 일본의 함상폭격기들에 의해 깨져버리고 말았다. 840명 이상이 전사하였고 그 후에 발생된 싱가폴 전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해군에서 일어난 가장 큰 재난임이 틀림없다.

내가 이 전투에 대해 연구를 하는 몇 년동안 나는 전 세계의 기관이나 개인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 중 한명이 런던에 일본무관으로 있는 마에타니 일등 육좌이다. 나는 그에게 만일 리펄스와 프린스오브 웨일즈를 격침시킨 구 일본해군의 카노야전대와 미호로전대에 아직 생존자가 있다면 그들의 견해를 듣고 싶으니 조사해 달라고 편지를 썼다.

몇주가 지난 후 하루키이키 대위라는 카노야 항공대 소속이었던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답장을 보내왔다. 많은 편지가 오가면서 나는 점점 이키씨의 정직함을 느끼게 되었고 일본이 전쟁시 적에게 보였던 잔인함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 누그러지게 되었다. 그는 1941년 12월 11일 전투가 있었던 해역의 상공을 혼자 정찰 비행하면서 두송이의 꽃을 떨어뜨렸다고 했다.

나는 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에겐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영국의 포탄을 맞고 전사한 카노야 항공대의 대원을 위한 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전투에서 전사한 모든 영국병사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방어하던 영국병사들에게 감동을 받았고 일본 항공전대의 비행사들은 영국병사들에게 최고의 존경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올해 5월 22일 리펄스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 재단이 '플리머스'에 세워졌다. 즐거움과 웃음이 있었지만 나는 그 배들이 사라져간 승무원들의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될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자리는 남지나해(南中國海)이다.

by 무는개 | 2008/03/19 11:35 |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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